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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시한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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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어머니가 시한부다. 지난달에 알게 되었다. 솔직히 들었을 때, 별 생각이 없었다. 큰어머니를 안 보고 산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간다. 고1때인가, 그때 본 이후로 연락한적도 한번도 없었다. 다만, 나와 또래인 사촌의 마음이 어떨지, 떠올라 잠시 나도 마음이 아팠을 뿐이다. 그 뿐이었다.

엄마가 큰어머니를 보러 가자고 했다. 내 생각엔 엄마는 큰어머니와는 완전한 남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하지만 엄마는 가자고 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아빠는 갈 생각이 없었고, 결국 나와 엄마 둘이서 KTX를 타고 큰집에 다녀왔다. 큰집은 KTX를 타고도 3시간 이상 걸릴 정도로 멀다. 심지어 KTX를 타기 위해선 1시간 이상 기차를 타고 가야했다.

이 먼 물리적 거리만큼, 나의 심적 거리도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의 말마따나, 그래도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은 봐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따라 나섰다.

엄마의 일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바로 출발했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1030분이 넘어간 시간이었다. 우리는 그때가지 밥을 먹지 못했다. 도착하자 마자 역 앞에 있는 순댓국 집에서 허기를 채웠다. 엄마는 아픈 그 집에 폐를 끼치기 싫어 찜질방에 가서 자야 하나 하고 고민했지만, 큰집에서 와서 자라는 연락이 왔다. 엄마는 급하게 ATM기계로 가서 돈을 뽑았다. 먹을 것 과일 같은 것- 을 사갈까 했지만, 아픈 사람이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도록 돈을 주는 것이 더 좋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돈을 뽑았다. 큰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집 입장에서는 큰 돈이 였다. - 우리집은 형편이 좋지 않다. –

서로 연락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의 집 형편에 대해서도 아마 잘 모를 것이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큰집도 형편이 그다지 넉넉하지는 않다.

 

큰집에 도착했을 때, 11시가 넘은 시간이었기에, 도착하자 마자 인사를 하고, 각자 방에서 잠을 잤다. 편한 자리에서 잠을 잤다. 큰어머니께서 잠자리를 준비해 주셨다. 원래 큰어머니께서 주무시는 방인데, 멀리서 온 우리를 위해 방을 양보해 주셨다. 그냥 거실에서 자도 괜찮은데, 너무 죄송했다. 하지만, 큰어머니는 그리하기를 바라셨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다음날 9시쯤 일어났을까, 큰어머니가 아프기 때문인지 식사를 잘 챙기지 않는 듯했다. 큰아버지가 밖에서 빵을 사 오셨다. 큰어머니 나 엄마 셋이 테이블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었다. 슬퍼하거나 울지 않았다. 그 앞에서 슬퍼하기에는 너무 떨어져 산 시간이 길었고, 서로에 대해 몰랐다. 다만 좋지도 않았다. 큰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언제 시한부 선고를 받았고, 시한부 선고를 받고 딸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항상 옆에 있어준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시한부 애기를 듣고 와서 통곡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심지어 가족도 아닌 사람이, 큰어머니는 그런 호들갑이 싫다고 하셨다. 너무 부질없다 했다. 지금껏 큰아버지의 부족한 경제력을 뒷받침 하기위해, 쉴 새 없이 일해야 했다. 하지만 결국 앞에 남은 것은 무엇 인 가.

 

 

작년에,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갑자기 돌아가셨다. 뇌졸증 이셨다. 원래 심장이 좋지 않아 약을 계속 복용해왔는데, 정말 갑자기 쓰러지셨다. 친구가 그 이후로 너무 힘들어 했다. 좋은 아버지였다. 가부장적이시기도 했지만, 가정적이고 따뜻한 분이셨다. 쓰러지신 당일 아버지에게 큰소리로 화를 냈다고 했다. 너무 후회된다 했다. 뇌졸증으로 쓰러지시고 병원에 실려왔다. 의식불명으로 3일인가 있다 돌아가셨다. 친구는 쓰러지신 당일 돌아가셨다면 일어서지 못했을 거라고, 죽음을 바로 직면하지 않고 그 3일의 유예가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버텼다고 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3일을 버텨주어서 아버지에게 감사하다 했다.

 

 

시한부가 결코 좋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어떨까. 서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표현하고, 슬퍼하고, 기뻐할 마지막 기회. 나 없는 삶을 살아가야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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